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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역사이야기

광해군의 중립외교란 무엇인가?

광해군(1575-1641, 재위 : 1608-1623)

아버지 선조의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었던 광해군은 왕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왕자였습니다. 그런 그는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국력이 약한 약소국의 위치를 확실히 알게 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거쳐 후금의 건국으로부터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의 동북아시아. 조선의 역사에서 후기를 제외하면 가장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왕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에서 딱 세명뿐인 강제로 왕위를 물러나게된 왕중 한명입니다. 그의 폐주라는 멍에는 확실히 요즘 달라진것이 분명한듯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때도 분명 광해군의 업적이라는 것데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데 광해군의 그 업적이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중립외교라고 하는데요. 항상 말로만 들었던 그 중립외교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찾아봤습니다. 광해군의 그 중립외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한 것인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조선의 분위기 !

제주도에 남아있는 광해군의 유배지입니다. 여기서 광해군은 1641년 나이 67세에 사망하는데요. 일국의 왕이었던 사람의 마지막 보금자리라고 생각하기엔 참 초라합니다. 인조반정때 광해군의 죄명 중 가장 큰것은 은혜의 나라에 배신하고 오랑캐에게 호의를 배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은혜의 나라는 명나라이고 오랑캐의 나라는 후금.. 나중에 청나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게 무슨 큰 죄였을까요.

전 국토를 유린당한 임진왜란. 위 그림은 일본군의 진군로를 보여줍니다. 전란이 일어나서 점령당했던 곳만 다시 표현하면

위와 같습니다. 일본도 조선도 분명 끝이라고 생각해도 당연할 정돈데요. 저 시점만 보면 확실히 저 때 전쟁이 끝났다면 조선은 전라남도만 남았거나 왕이 있던 지금의 신의주 부근만 남았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때 명나라가 참전하는데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의 전과중 가장 큰 전과는 바로 평양성 탈환입니다.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이 사건이 당시 우리나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을 은혜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이때 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나라를 다시 건설하게 해준 은혜라는 뜻인데요. 사대부들은 당시 명의 재조지은에 보답해야한다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화사상으로 중무장한 중국의 지배층은 주변국으로부터 소위 말하는 접대를 받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전쟁도 불사할 정도인데요. 역사에서 그런 예가 정말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고구려-수나라의 전쟁도 그 시작은 그게 원인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구요. 하여간, 명나라처럼 주변 국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나라는 외교적으로 자신을 동급 혹은 무시하면서 동맹국을 건드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때 일본의 조선 침략도 같은 문제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하지만, 국제 정세가 친구간에 돈빌려주고 받는것도 아니고,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데 순수하게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즉, 그들도 그들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게 또 문제였던 것이지요.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동묘입니다. 중국식으로 지어진 이 사당은 살짝 이상하게도

관우의 사당입니다. 조선의 수도에 삼국지의 관우의 사당이 들어선 이유는 임진왜란 때문인데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의 황제는 명과 조선이 일본을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우의 혼백이 돌봐주었기 대문이라고 말하고 사당을 지으라고 권유합니다. 이에 조선은 3년의 공사끝에 서울을 포함 여러군데에 이 관우의 사당을 짓게 됩니다. 전란이 끝나고 국력이 상당히 약해졌던 이때에 저런 사당을 지었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당시 조선 지배층의 명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여하튼 조선은 당장 나라의 재건과 지배층에 실망한 피지배층의 동요를 다독여야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동북아시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 !

바로 1616년 후금의 등장입니다. 누르하치가 일으킨 후금은 명의 동북방 방위 전략에 큰 위협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누르하치는 1559년부터 1626년 동안 생존했던 인물로 광해군의 재위기간과 정확히 겹칩니다. 광해군은 이 당시 실제 활동하고 있던 생존 인물 중 동북아시아의 최대 영웅의 일생을 직접 경험하는 접경 국가의 왕이었던 거죠. 당시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여서 국력의 재건에 온 힘을 쏟고 있던 중이라 전쟁은 피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국토가 전쟁터였던 조선이 더 절실했겠죠. 평화... 말입니다. 그런데 신생국. 그것도 강력한 신생국 후금이 조선과 국경을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은혜의 나라는 좀 떨어져 있구요. 이게 조선의 입장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아직 청나라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고 명을 완전히 제압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후금 입장에서도 조선과 명을 둘다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비록 기울어져가는 국력이지만 명색이 황제의 나라 명의 입장에서 동북방어선의 거점인 요동을 그냥 오랑캐에게 헌납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지요.

광해군의 경험 !

광해군은 군사를 직접 이끈 경험은 없을 지 몰라도 전쟁은 충분히 경험한 왕입니다.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갔을때 분조(조정의 기능 일부를 분리시킨 작은 규모의 정부)를 이끌고 한반도를 돌며 항쟁을 독려했던 것은 광해군입니다.

먼저 함경도 평안도 일대를 돌며 전쟁을 독려합니다. 그후 평양탈환 후에는

경기도 전라도 일대를 돌며 분조를 이끕니다. 사실상 피난간 선조 대신에 전란에 휩쌓인 국토를 직접 돌봐주던 행정의 책임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아버지 선조에게 보낸 장계를 보면 나타납니다.

이렇게 무너지는 국가를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서 그는 피난간 아버지 왕 선조, 그 옆에서 같이 피난가서 명나라만 바라보던 최상위 지배층에 비하면 좀더 현장에서 전쟁에 유린되는 국토와 민심을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특히 1598년에 끝난 정유재란까지 하면 명나라 장수들과 함께 생활한 광해군은 함경도 일대있을 때부터 분명 누르하치라는 영웅을 알고있었을 것이고, 명나라 장수들의 입을 통해 누르하치를 바라보는 명의 분위기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명나라의 국력도 분명 가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선조-광해군-인조... 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에서 광해군은 누구보다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현실, 명나라의 현실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서 또한 현장의 경험또한 풍부했다는 것입니다.

강홍립 !

여기서 꼭 언급해야할 장수가 강홍립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후금정벌을 위한 명의 출정에서 조선의 출병도 강요받은 광해군이 1만2천명이나 되는 군사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무관 출신이 아닙니다.

위에 보다시피 문과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인물입니다. 저기서 첫 관직이 서장관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장관은 사신단에 포함된 관직입니다. 외교관인거죠. 강홍립은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분위기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한 중국어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순검사를 지내며 군무에도 능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문무에 능하면서 국세정세를 읽는 능력과 외국어 능력을 겸비했네요. 지금 태어났다면 껄끄러운 나라에 대사로 파견해도 꽤 좋을 인재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그를 광해군은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정벌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벌써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지요. 후금의 수도를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는 총 4개의 길로 군대를 진군 시킵니다. 이때 조선은 그 후방에서

위 파란선으로 표시된 부분을 따라 진군하는 것이었습니다. 후금의 도읍지 히투알라를 산하나를 놓고 주둔중이던 강홍립장군은 명나라 군대가 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대 강홍립은 미련없이 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망설이지 않고 투항해 버립니다. 만이천명과 함께 말이죠. 분명 광해군과 미리 이야기 되었을 겁니다. 흉내만내고 실제로는 싸우지 않는다...는것 말이죠. 그 후 강홍립은 포로로 7년을 더 생활하는데요. 포로의 생활이 아니라 첩자이자 외교관으로서 활동합니다.

이런 편지를 광해군과 주고 받으면서 말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1619년 일어난 이 전투 후에 아직 강홍립이 포로였던 시기에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만이천명의 병사와 함께 강홍립도 그냥 잊혀져버릴뻔 한 것이지요. 그 후 강홍립만 따로 귀국합니다만, 죽을때까지 무시당하며 살게 됩니다.

김응하 !

여기서 또 거론해야할 장수가 김응하 장군입니다. 그는 강홍립 장군의 부관으로 같이 출정한 장수인데요.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일대를 방비하다가 40세에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입니다. 그는 강홍립의 명을 받고 별동대 3천을 이끌고 명의 군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의 장수입니다. 싸우는 시늉만 하더라도 전과가 있긴 해야했기 때문인데요. 이때 김응하 장군은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이 전투와 그의 전사를 기리며 명의 황제는 벼슬을 하사하고, 조선의 광해군은 영의정에 추의하고 심지어 세 군데의 사당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 사당의 위치가 중국에서 사신단이 오면 지나가는 길목에다가 지은 것이지요. 우리도 희생했다는 홍보의 의미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후금 대책 !

신하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랑캐 후금(청)을 섬기려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명은 저물고 후금이 일어설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명의 요청을 들어주는 시늉도 했고 그러면서 후금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꽤 애를 씁니다만 근본적으로 외교만으로는 되지 않을 문제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무기의 개량에 힘을 쏟는데요.

특이한 포를 개발합니다. 위의 오른쪽 인데요. 왼쪽은 기존의 대포로 한 번 쏘면 뒤로 밀리고 다시 장전하고 위치를 고정하는데 꽤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오른쪽 포는 저렇게 쏘고 난 다음

자포라고 하는 것을 이용해서 포탄이 들어가 있는 부분만 교체하면 되도록 한 것이지요. 연사속도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전차도 개발합니다. (이 전차는 고구려때부터 있던 것이라고 하네요^^)이 전차를 많이 생산하고 개량했다고 합니다. 앞에는 긴 창을 설치하고 중간에 방패를 단 것인데요. 위 두 무기를 개발한것은 바로 후금의 주력부대가 철갑기병이기 때문입니다. 기병은 그냥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지역에서 어릴때부터 말을 다룰줄 알아야하는 데요. 그래서 기병을 양성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용병을 극도로 사용하기 싫어한 그들도 기병만큼은 동맹국에서 조달했을 정도니까요. 이런 후금의 주력부대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들을 개발한 것입니다. 저 전차는

저렇게 전장에서 기병의 전면에 배치될 용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밖으로는 외교술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안으로는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후금을 섬기려 한다는 신하의 의심에 광해군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광해군 !

광해군 그의 중립외교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각종 자료를 찾아 읽어보고, KBS의 다큐멘터리(역사스페셜)도 보았습니다. 분명한건 그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지배층이 외면할려고 하던 조선의 현실도 냉철이 관찰할 수 있었고, 후금과 명의 현실도 분명 인지할 수 있는 위치와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명분이 중요한 국제 외교에서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양쪽에 줄다리기도 참 잘 한듯합니다. 광해군의 나머지 업적이나 실책은 잘 모르겠지만, 이 중립외교만큼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큰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이 죽은 연도는 1641년입니다. 반정을 통해 인조가 정권을 잡고 친명정책을 펴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난 연도가 1636년12월부터입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분명 병자호란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자료가 없습니다만 안타까움이라는 느낌은 분명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7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 30년간 항쟁한 고려와 원나라의 전쟁, 70년간 수나라-당나라에 항쟁한 고구려에 비하면 이 병자호란은 1636년12월부터 1637년1월까지 딱 2개월간입니다. 조선이 얼마나 전쟁의 준비가 부족했는지 얼마나 적국에 대해 몰랐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자 광해군의 정책이 얼마나 유효했는지를 알 수 있는 예이기도 합니다. 1644년에 멸망한 은혜의 나라 명나라는 이미 다시 은혜를 줄 수 있는 여지가 없었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디피아 (http://ko.wikipedia.org/)

KBS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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