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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역사이야기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왜 그리도 허무하게 무너졌나.

공학도의 블로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광해군과 소현세자 이야기를 올리고 있었네요. 광해군이든 소현세자든 이야기하다보면 꼭 임진왜란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의문이 들더군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왜 그리도 허무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의문이지요. 초등학교때 단순히 주입식으로 배웠던 소총때문일까? 설마... 제가 좋아하는 소설 "은하영웅전설"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스페인과 잉카제국의 관계 정도를 빼고나면 무기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절정지었던 적은 없고,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전략과 전술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그 말을 떠올리면 몇몇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뭐 언제나 그렇듯 이 글은 그 자료의 조사 결과를 그저 나열하는 수준의 글입니다.^^.

문제.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왜 그리도 허무하게 무너졌나 ?!

위 그림을 보면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기세를 알 수 있습니다. 4월14일을 시작으로 한강방어진을 돌파하는 날짜가 5월 2일입니다. 부산에 사는 선비가 한양에 과거보러가는 여정처럼 그저 걸어간듯한 저 날짜가 도대체 의문입니다. 조선은 방위라는 개념조차 없었나? 하는 의문 마저 듭니다.

답변 1. 일본은 얼마나 강력했는가 ?!

일단 처음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렇게 전격 작전으로 한마디로 표현해서 싹 쓸어버릴정도라면 일본은 얼마나 강력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일본이 임진왜란 초반 투입한 군사력은 낮게 잡아도 16만명을 한방에 투입합니다. 16만명... 그런데 군사력에서 숫자도 중요하겠지만, 이 병사의 질도 따져봐야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 세계적으로 15만명 이상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자체가 얼마 없었습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국가는 명나라와일본이라고 해 두어야겠네요. 그런데 국운이 기울었던 명과는 달리 일본의 당시 16만명은 얼마전까지 실전 전투를 치뤄낸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한 임진왜란 직전. 전국시대를 마감하면서 남은 부산물로 이 막대한 군사력이 남은 것입니다. 혼란한 국내를 전쟁으로 통합한 경우 예외없이 이와같은 군사력이 남게 됩니다. 이 군사력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통일을 이뤄낸 지배자의 숙제가 되는데요. 실제 제정로마를 탄생시킨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는 국가의 재정상태를 가늠해서 아슬아슬한 경계선까지 군사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30년이상의 시간을 공들여 작업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노력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재정입니다.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하기엔 돈이 많이 들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반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통상 통일이라는 원대한 작업을 끝낸 지배자들이 또한 그 다음으로 수행하는 대외적인 정복사업도 이런 이유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요.

하여간 당시 일본군은 전국시대의 통일전쟁을 치루면서 어마어마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는 정예병사들이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그들의 지휘관들이 전국시대 각 성의 성주들로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과 유대관계도 높고, 그들 역시도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라 하더라도 원정입니다. 단지 그들의 전투 의욕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 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개전 20일만에 수도를 점령당한 것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소총입니다. 이 무기 때문에 육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대신 수전에서는 대포로 이길 수 있었다는 교육... 저도 어릴때 받았던 교육입니다. 그럼 정말 소총 때문일까요. 소총이 유용한 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소총이 있고 없고의 차이도 분명 나타났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해야하는 것은 그 전쟁터 자체를 놓고 보면 곤란합니다. 전쟁의 전후 사정을 다 알아야하는 것이지요.

소총의 존재유무는 조선도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있었다고 봐야할 듯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총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무기의 선택이 아니라 전략의 선택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답변 2. 조선의 방위전략은 무엇이었나 ?!

이제, 조선의 방위력을 한번 알아봐야할 것입니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전체 군인수는 14만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공격하러 가는것이 아니라 수비를 하는 것이므로 실제 상시 수비군의 숫자를 알아야합니다. 위 표에 있듯이 정예군은 2만 3천여명으로 나타납니다. 이중 순수 군사는 8천명이고, 나머지는 군사를 보충하는 보충병입니다. 이나마도 8천이 항상 있었던 것이 아니라 2천명씩 교대로 국방을 지켰다고 합니다. 즉, 각 지역 고을이나 성의 수비가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던 군사를 빼고나면 가용 병력은 일단 2천명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나마 북방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별 치안 유지군을 제외하면 딱 8천명이네요. 즉, 8천대 16만의 대결이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 황당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요. 일단 역시 돈이 문제입니다. 당시 조선은 양민의 수는 줄어들고, 지배계층은 점점 부자가 되고, 결론적으로 세금을 내는 양민이 줄어들어 국가의 재정이 또한 빈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계할려는 각종 노력이 많이 있었지만, 항상 실패로 돌아갔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가 재정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군사력의 약화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북방으로 군사력이 몰려있었던 것은 일단 여진족이라는 오랑캐가 걸어서(실제로는 말타고) 국경을 쉽게 넘으니 그쪽에 배치 시켜 주었던 것이지요. 그럼 남쪽의 왜구는? 하시겠지만, 조선 초기 왜구의 진원지인 대마도를 복속시킨것도 있고, 대마도주와의 협상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엔 왜구는 소수의 인원을 이용한 게릴라 식의 해적질이어서 속수무책이었다고 봐도 될것입니다.

본래 조선의 방위체게는 진관법이었습니다.

각 거점별로 군사력을 가지고, 그 군사력에 대한 책임자를 임명해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거점이 무너져도 다음 거점이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인데요. 문제는 이 진관법은 살짝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국가 재정이 문제를 가지기 시작한 이후, 위 진관법은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각 거점이 각개격파로 무너져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지요. 당시 지배층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은 위 진관법을 제승방략 체제로 변경합니다.

제승방략 체제라는 것은 문제가 생기면 각 거점의 군사가 미리 지정된 장소로 모이고, 그 동안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는 형태입니다. 그렇게 해서 규모가 큰 적에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조선은 육군은 위의 제승방략의 방법을 체택합니다. 그러나 수군은 숙련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진관법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 제승방략 체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의 왜구에게는 그래도 잘 동작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의 일본 정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조선을 알 지 못햇습니다. 즉 위 제승방략 체제에 헛점이 발생한 것입니다.

즉, 경상도 상주지역인데요. 한양에서 지휘관을 파견하기 전 삼도의 군사는 이미 상주지역에 모여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지휘관이 도착하기전에 일본군이 먼저 도착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남쪽의 군사력은 괴멸되 버립니다. 이때문에 조선은 계속 한발짝 늦은 대책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전군의 괴멸로 이어져버립니다.

문제는 국제정세를 판단하려는 노력과 올바른 전략... !

무기의 차이는 전술의 차이를 불러올지는 몰라도 무기때문에 ... 라고 말하기엔 부족합니다. 결국 전략인데요. 전략적인 안목으로 무기를 개발하고 병사를 훈련하고, 혹은 외교도 하고, 어떨땐 정복전쟁으로 선공을 나서기도 하는 것인데요. 당시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판단하는데 실패합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선조에게 자신의 휘하로 들어와서 같이 명을 치자고 합니다. 이 내용을 당시 대마도주가 왕에게 전달하는데요. 조선과의 무역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대마도주는 조선에 이 사실을 알릴때, 내용을 왜곡시킵니다. 일본의 통치자가 바뀌었으니 인사나 한번 하는 것이 어떠냐? 히데요시는 명나라로 가려 하는데 그 길을 좀 열어달라... 정도의 수준으로 바꿔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조선은 대마도주를 통한 정보입수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 정도로 조선의 눈치를 보는 것이 대마도주라는 위치였다면, 분명 은밀히 대마도주에게 접촉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의지를 읽고도 남았을텐데 말이지요. 어쩌면 적절한 외교적 협상을 통해 대마도주를 회유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분명 군사적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문제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마치 지금으로 따지면...

잉? 일본이 중국이랑 전쟁을?

뭐? 일본이 중국을 먹겠다고?

이런 미친....

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냥 그 이전까지의 습관에 의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제로 조선 방위전략의 헛점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쟁과 외교를 통해 한 국가를 통일한 사람입니다. 분명 사전에 정탐을 했을 것이 분명하고 또한 그로부터 필승의 전략을 수립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선 방위전략의 헛점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또한, 16만명이나 되는 병력이 전쟁을 준비하고, 숨길 생각도 없이 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라고 요구하는 적에 대해, 조선은 너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국가비상사태라도 선언하고 최소한 방위총책임자라도 선정해서 부산이든 군사거점이었던 상주든 배치시키고, 적정을 탐문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 전략적 판단의 실수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제 생각에는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그리도 허무하게 밀린 것은 당시 통치자들의 잘못된 국제 정세 판단으로 인한 전략의 실패입니다. 물론 일본군도 임진왜란 중반 전략의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원정 실패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혹시 시간이 허락하면 그것도 한번 포스팅하고 싶네요.)

단순한 의문으로 시작한 이 포스팅을 위해 조사해야할 것들이 많더군요. 제가 생각한 결론을 이야기하기 위해 언급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특히 무기의 부분인데요. 이는 따로 이야기해야할 듯해서요.(시간이...ㅜ.ㅜ) 이 글을 위한 자료는 모두 요근래 즐겨보는 KSB 역사스페셜과 저의 즐겨찾기 1위인 위키디피아백과사전과 여러 블로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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