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생활/역사이야기

오늘의 유럽을 만든 - 알레시아 공방전


오늘은 율리우스카이사르의 여러 전투 중에서 알레시아 공방전에 대해 이야기 할려고 합니다.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전투이자 그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서 로마내에서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고권력자가 됨으로서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가 또한 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알레시아 전투를 오늘의 유럽을 만든 시작이 되는 전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유명한 전투를 한번 소개할려고 합니다.


저 지도에 표시된 영역은 BC 70년경 로마의 영토입니다. 그리고, BC 60년 경. 마흔의 늦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BC 44년 쯤의 로마 영토입니다. 사실상 첫 지도에서 두번째로 넘어오면서 확장된 20년간의 영토는 모조리 율리우스 카이사르(영: 줄리어스 시저)의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 치고는 뭔가 좀 작은것 아닌가??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오늘 이야기할 알레시아 공방전을 끝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금의 프랑스일대, 즉 갈리아인(영: 켈트족)을 굴복 시킵니다.

갈리아를 굴복시킴으로서 국내의 정치적 입지를 아주 강화하고, 단지 이름만 있던 귀족에서 국가를 지탱하는 유력한 사람으로 떠오릅니다. 그로인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화정로마를 끝내고 제정로마로 넘어가는 길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당시 로마는 국가 내부적으로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전체적인 세입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귀족들은 점점 부유해지는 반면, 국가 자체는 아주 허약해진 상황(어떤 나라의 현재 모습과 비슷하죠...ㅜㅜ)이었는데요. 이를 타도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크라쿠스 형제의 개혁.. 등등)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갈리아 정복을 계기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한방에 해결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것이죠.

즉, 오늘 이야기할 기원전 52년의 알레시아 공방전의 승리로 인해, 국가 로마의 생명을 몇백년은 연장시켜준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려준 전쟁입니다만...

그럼, 알레시아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위에 A라고 표시된 곳입니다.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데요. 저곳 알레시아는 당시에 갈리아인들에게는 성지였다고 하더군요. 오늘날은


저렇게 하늘에서 봤을때 좀 묘한 분위기를 가지는 곳이네요^^ 저곳 알레시아에서 


저 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랑 한판 붙은 장수는


저 분입니다. 이름은 베르킨게토릭스라고 하고, 아르베르니 족의 족장이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숨죽여 지내고 있던 갈리아인 전체를 통합하여 연합군을 구성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든 인물입니다.

그 후, 카이사르와 몇번의 승리와 패배를 교환하다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알레시아입니다. 그곳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8만명의 병사와 함께 농성전을 준비합니다.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거느린 군사는 5만명이 약간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 병력으로 카이사르는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알레시아 공방전은 전쟁사에서도 유래가 없는 특이한 전투입니다. 방금 이야기한대로, 8만명이 농성하는 곳을 5만명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것 때문에 특이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연락을 해서 구원병을 부르는데요. 전투에 참가한 구원병의 수가 보병25만명에 기병 8천명이었습니다.

알레시아 공방전이 유럽을 만들던 뭐든간에 전투 그 자체로도 전사에 유래없는 것은,

5만명이 8만명을 포위하고, 다시 26만명에게 포위된 전투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위 그림처럼 포위망을 구축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포위망이 양면인거죠. 


알레시아에 틀어박힌 베르킨게토릭스 휘하 8만명의 포위진과 다시 구원병 26만명을 대비해서 바깥쪽에도 방어막을 구축한 것입니다. 단 5만명으로 말이죠. 안쪽 수비진의 길이는 대략 16.5 킬로미터이고, 바깥쪽 진지의 길이는 총 21킬로미터였다고 합니다. 합쳐서 37.5킬로미터의 진지였던거죠. 

그러면 이 유래없는 전투를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떻게 방비했을까요. 먼저


안밖 모두 저렇게 어마어마한 수비방벽을 구축합니다.


이 방벽 부분은 제가 즐겨 읽는 시오노 나나미 씨의 로마인 이갸기를 참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알레시아와 가장 가까운 쪽에 6미터 너비의 참호를 구축하고, 다시 4.5미터 너비의 참호를 하나 더 구축하고, 물을 채워둡니다. 그리고, 3.6미터 높이의 방벽을 세우고, 방책의 이음매 바깥쪽에는 적병이 오르지 못하도록 사슴뿔 모양의 나무뿌리를 깎아서 묻어둡니다. 망루와 망루사이의 거리는 24미터간격이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나무를 잘라와서 뾰족하게 깎은 다음, 참호 바깥쪽으로 1.5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파서 묻어 두었다고 힙니다. 이 방책을 방어선 전체에 다섯겹으로 둘러쌌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다시 그 바깥쪽에 깊이 9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두었는데 이게 V자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그 구덩이 속에 끝을 뾰족하게 깍고 불에 그을려 단단하게 만든 말뚝을 묻고, 땅위에는 두 뼘 길이만 남겨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풀로 덮어두었다고 하는 군요. 이 구덩이를 주사위의 5점면 처럼 90센티미터 간격으로 배치를 해두었는데 그것이 무려 8겹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시 그 바깥쪽에 30센티미터 길이의 말뚝을 박고, 말뚝 끝에 쇠갈고랑이를 설치해 두었다고 하네요.

아무리 수도교(관련글)나 도로망(관련글)을 만들었던 로마인이라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공시를 수행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더구나,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병사들의 공세를 막으면서 구축한 방어진이니 더욱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카이사르는 저런 방어벽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동시에 병사들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요. 그 훈련의 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중간 지휘관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수비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번의 결전 후에 마지막 날이 다가왔습니다. 갈리아군은 카이사르의 방책중 가장 약한 북쪽 부분에 6만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들도 안과 밖에서 공격해 왔습니다.

상상을 조금만 해봐도 안밖에서 34만명의 적병이 안과 밖에서 둘러싸서 공격해오는 그 함성. 아군 5만명의 함성. 화살이 날라오는 소리. 비명... 그 와중에 카이사르의 명령이 일개 병사 개개인에게 전달될리 없습니다. 이때 활약하는 것이 바로 평상시의 훈련입니다. 겨우 30살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조차도 지원병력을 보내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500면단위의 유격대를 이끌고 종횡무진 활약했으며, 일개 졸병조차도 자신의 수비지점을 정확히 찾아 내어, 투창을 했다고 합니다.

방어진 최대 약점인 북쪽 방벽지역에는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라비에누스가 5만명중 1만명을 데리고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곳에서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연락과 함께 돌격해서 백병전을 치르겠다는 연락이 옵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지원군을 데리고 갑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보낸 로마 기병대가 적 배후에 나타나면서 기나긴 전투가 끝이 납니다.

위키백과사전에서는 알레시아 전투 결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해상황 : 로마군 12800명, 갈리아군 괴멸.

이렇게 말이죠. 5만명이 8만명을 포위하고, 다시 26만명에게 포위되어 치뤄진 전투. 알레시아 공방전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충격으로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해버리는데요


이 알레시아공방전 이후, 갈리아는 로마연합의 일부가 되어, 300백년 간이나 반란도 없이 평온히 지냈다고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