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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역사이야기

고대 로마에도 교통체증이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지요. 기원전 1세기 중엽 도시 로마의 인구는 대략 100만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때 로마제정의 창시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교통 체증 대책법'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법률은 일출때부터 일몰때까지는 마차의 로마 시내 진입을 금지한 조항이라고 하는군요. 이런 법이 만들어질 정도로 로마의 교통체증 및 소음은 심했다고 하는데요. 이참에 당시 로마의 길과 교통에 대해 살짝 알아봤습니다. 그걸 얇디얇은 지식으로 살짝 정리해볼까합니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를 수 있는 강대국 로마!  
 

 고대 로마가 기원전 1세기쯤이면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쥴리우스 시저)에 이어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 시대에 이르면,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데요. 그러면서 지중해를 "내해" 혹은 "우리바다"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왜 우리바다라고 부를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지요. 사실상 지금의 유럽은 로마제국에서 시작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인데요.^^. (뭐 물론 위 지도는 로마제국 최대의 넓이입니다만... 아마 5현제 시대쯤이겠지요) 위 대제국을 건설한것도 대단하지만, 로마인들은 그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고 대제국을 관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게 만든거죠.

   로마식 도로의 시작  
 

 로마의 도로는 그냥 도로가 아닙니다. 물론 처음 시작할 때는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만든 것이긴 하지요. 그럼 왜 군대의 신속한 이동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로마 군대의 주체가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방위를 담당할 군대의 병사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기 나라 국민으로 한정했는데요. 당시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하던 지중해세계의 일반적 관습과는 많이 다랐지요. 그게 왜 도로랑 관계가 있냐구요? 일반 시민이다 보니 몇년씩 전쟁터에 나가있을 수 없거든요. 일반 시민이니 집에서 농사짓고 생활해야했거든요. 제정 직전 마리우스의 개혁이 있기 전까지 로마는 1년에 한번씩 시민들중 독특한 추첨 방법으로 병사를 뽑아서 전쟁터로 내보내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군대의 신속한 이동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던 겁니다.
 또, 당시 로마는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보급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민족이었습니다. 군대가 지나가고 식량과 무기를 마차에 싣고 신속히 이동할 필요도 생겼거든요. 나폴레옹이라는 대단한 장수가 이끌던 군대도 굶주린 상태에서는 러시아한테 이길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군사적 목적이었던 저 도로가 일반 시민들에게도 도움을 주기 시작한겁니다. 일단 안전보장이지요. 뻑하면 군대가 지나다니는 길에 도적이 나타날리가 없지요. 마차의 이동까지 배려를 했으니 상인들의 이동이 편해지기 시작한겁니다.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경제발전 또한 이뤄질 수 있게 된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로마의 도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는


위 지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주요 도로망입니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도로망을 만들어 놨으니, 군대의 이동뿐만 아니라, 상인부터 심지어 관광객까지도 안전하게 돌아댕길 수 있었을 겁니다. 

   로마는 어떻게 도로를 만들었나?  
 

 로마식 도로는 정말 우직하게 만들어지는데요.


 위 그림처럼 땅을 파고 5층으로 구성합니다. 2천년전에 도로가 위와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물길도 내고, 왕복2차선까지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저렇게 터널까지 뚤었다고 합니다. 그 2천년 전에 말이지요. 고대 로마인들은 상수도망을 완성해서 도심까지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수도교"도 만든 민족이니 저런 터널쯤이야 그냥 뚫었겠지요. 또, 빗물에 진흙탕이 된 도로에 옷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중간에 횡단보도처럼


디딤돌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대로마인을 공학의 시초로 보는분들이 많은데 저 역시 공감합니다.

   로마의 교통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렇게 도로망이 구성되면 당연히 교통체제도 구성될것입니다. 일단 로마는  우리의 우체국같은 것을 만들어서 활용했습니다. 그것도 국영우편제도입니다. 저 온 나라 곳곳으로 뻗어있는 도로망을 따라 우편마차가 달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차로 하루를 달릴 수 있는 거리 마다 주유소에 해당하는 역참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우편은 말이 지치고 안지치고에 관계없이 정확한 날짜에 배달되는 것이지요. 또한 당시 로마인의 장점들 중 하나지만, 저 국영우편제도를 지배층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개방해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역참-말교환소- 몇 개 마다 하나씩 숙박 설비도 완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숙박시설보다 좀 많은 수의 휴게소를 두었다고 하는 군요. 
 여기서 일반 시민들은 그 길로 걸어다녔을 거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론 돈있는 사람들이야 자기 마차를 타고 다녔을 것이지만, 지금의 렌트카나 택시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조차 이용할 수 없을때는 버스의 개념으로 합승마차가 또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 합승마차들이 역참마다 정지하면 집까지 걸어가면 되는 겁니다. 바다를 건너는 걸 빼고 마차만 이용할때, 제국의 변경에서 병사로 근무하는 아들 면회를 떠나는 어머니들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분명 마차들의 소음으로 꽤나 시끄러웠을 겁니다. 왜냐면 당시엔 고무가 없었거든요. 그냥 나무나 쇠가 도로랑 만났을 테니.. 그 소음은 분명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그러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교통대책을 세웠겠지요. 
 하지만 로마는 그 도로를 가지고 세계(당시 지중해 문화권)를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해도 맞는 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 길은 양날의 검이거든요. 군대를 진격시키기 참 편한 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침공당하기도 편한 길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넓은 제국을 딸랑 20만명의 병사로 지켜낸 로마입니다. 그것도 역시 로마의 도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참고로 제가 좋아하는 시오노 나나미씨의 로마인이야기10권에 이런말이 있군요.

  인류가 고대 로마 도로에서의 이동 속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철도가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20세기 이후이다. 

분명 


저렇게 광대한 제국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도로는 인간의 대동맥같은 역활을 했을 겁니다. 참고로 당시 로마 공학자들은 가만히 냅둬도 자기들이 만든 도로나 다리는 백년은 갈꺼라고 장담했다고 하는 군요. 그 말은 틀렸다는 것이 지금 밝혀졌지요. 가만히 냅뒀더니 백년이 아니라 위의 사진처럼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쓸데없는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위 얇디얇은 지식은 모두 제가 좋아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진은 모두 해외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인데 영어 울렁증으로 인해 인용한다는 허락은 받질 못했습니다.(ㅜ.ㅜ) 그리고 로마시 조감도와 지도를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는 로마 도로 유적의 실제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왜 카테고리가 "미스테리"냐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지만(ㅜ.ㅜ) 저런 도로망을 남긴 로마인이 전 미스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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