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름
1995년 대학교에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제 주변에는 흔히 운동 좀 하는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한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이미 막을 내린 그때, 그들의 고민은 점점 희박해지는 시민들의 지지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1994년 혹은 1993년에 치열한 대학가의 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기억하시지만, 분명 저는 95년 봄과 여름사이 경상남도 도청 근처에 위치한 한 작은 대학교에서 맡았던 최루탄 냄새를 기억합니다.
농활을 떠나서 밤새도록 통일에 대해 토론하고 엄청 술먹고,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해소되지 않은 숙취에도 논두렁 어딘가에서 낫질을 했습니다. 농민들에게 통일을 이야기하고 선배들과 가열차게 토론하던 1995년의 여름... 그때 저는 그냥 남자는 공대인가보다하고 아무 생각없이 선택했던 대학보다 그렇게 국가와 민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더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마산.창원 지역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1996년 가을
1995년 11월. 저는 강원도 홍천의 당시에는 보병사단이었던 곳으로 입대를 했습니다. 그저 끌려간 군대라는 느낌때문에 열의도 없었고, 그냥 저냥 시간 가는대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다 되어가던 1996년 가을 새벽.
- 갑자기 사이렌이 전 부대에 울리고,
- 훈련도 아닌데 군장을 꾸리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 수송부대가 부대에 도착하고,
- 그리고... 공포탄 조차도 하나하나 갯수를 세어서 주던 그때,
- 갑자기 실탄을 배급받았습니다.
아직 이게 무슨일인가 할때, 강릉에서 무장공비의 잠수함이 발견되었고 교전이 있었으며 다수의 공비가 탈출했으니 저지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96년 9월부터 겨울까지, 제 기억의 1996년 가을/겨울은 너무나 추웠다는 기억뿐입니다. 낮에는 무장공비들이 무덤을 파서 그 안에서 숨어있다는 첩보때문에 탐침봉이라는 뾰족하고 긴 쇠막대를 들고 무덤들을 찌르고 다니다가, 밤에는 저지선을 따라 구축된 감시호에 2~3명씩 들어가서 경계근무를 섰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 기사
그러다가 소문에 우리 사단의 옆 연대에서 교전중 전사한 사병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나서는 비록 제가 있던 연대는 실제 교전은 없었지만, 자주 긴장했던 것 기억이 납니다.
한 번은 중대장과 함께 소수의 인원으로 이동하다가, 약초를 캐러 왔다는 한 남자를 만났고, 그가 수상하다는 판단을 한 중대장의 판단에 따라 그를 트럭 뒤에 태우고 신원확인을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중대장은 선탑을 했고, 저와 한 선임병은 트럭 뒤에서 그 약초꾼을 감시했는데, 우리 둘의 총구는 그 약초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장전되어 있지도 않았고, 마을 주변에 정찰임무 중도 아니어서 실탄이 있던 탄창은 그저 탄창집에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나의 총구는 주민을 향해 있었습니다.
비록 선배들을 따라 다녔고, 실제 계산해보면 단 몇 개월의 경험이지만, 대학에서 운동권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주제넘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독재자들에 대해 공부하고 통일을 고민하던 저는, 199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경험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작전은 너무나 많은 혼돈을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우리와 같은 지역, 같은 사단의 병사도 전투중에 사망하고, 내가 마을 주민에게 총구를 겨눌 수도 있다는 그 경험을 책에서나 보던 6.25도 아니고, 1996년 내 나이 21살.. 그 때의 경험이 너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2009년 겨울
군대를 제대할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학점을 걱정해야하는 대학생으로 복학한 것 뿐이었고, 그저 그렇게 대학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별다를 것 없던 대학생활이었지만, 여전히 전공에는 큰 관심없이,
- 수도원에서 몇 주 생활도 하고
-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한 자원봉사도 하고
- 고아원에서 몇주씩 자원봉사도 하고
-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자원봉사도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에 관심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학부 4학년(참 늦었죠)때 역진자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나고, 수학과 제어이론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석사에서 박사과정까지 진학했고, 박사과정을 마쳐야하는 어느때쯤...
무서웠습니다. 학교를 떠나서 난 뭘 할 수 있을까. 취업은 할 수 있을까. 겨우 간신히 전문대나 모교에서 시간강의나 할 수 있는게 나의 능력의 전부인데, 과연 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다가 학교 근처 (당시) 제가 있던 학교 근처의 한 전문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진해의 해군사관학교내에 있는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월급 25만원 정도의 강의였지만, 즐겁게 고마운 마음으로 수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군인들인 그 수강생들과 친해지려는 시도로 기억속에 잊고 있던 1996년 강릉 간첩 작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에게 (최소한 저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96년 간첩작전에서 살아남은 북한 군인이 진해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며 주로 정훈교육 강의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듯 했지만, 96년의 추웠던 겨울을 경험하고, 2009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던 저에게는 수십명의 국군 장병이 전투 중 사망했던 96년 겨울의 그 적군 중 유일 생존자가 저렇게 생각보다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또 혼란스러웠습니다.
2020년 봄
세상은 뭐가 맞고 틀리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2020년 총선. 대한민국에서 대구만큼이나 안보와 경제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은 강남에서 북한에서 탈출한 고위 관료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분도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고, 또 혹은 멋지게 의정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참, 사람 사는 세상은 항상 어울릴것 같지 않은 것들이 뭉쳐지고 섞여서 지내나 봅니다.
세상은 나이를 먹어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하나 봅니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2020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의 고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어줍잖은 지식으로도 역사에서 자신의 주의를 전향하고 더 열성적으로 일했던 사례는 많은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그래왔듯 분명 발전할 겁니다. 문득 2020년 선거를 보며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아무런 결론도 없는 글을 끄적거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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