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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충신 - 고영근 -

category 문화생활/역사이야기 2010.07.15 05:43
아무것도 해놓은게 없는데 또 아침이 옵니다. 예전에 아무 걱정없이 술값있는 선배만 옆에 있다면, 든든했던 20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드네요. 이렇게 스트레스 받을땐, 희한하게 전 다큐멘터리 - 그중에서도 역사물을 찾아보는데요. 이번에는 올해 초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고영근 편이네요. 그 이야기나 깨작깨작 해볼려고합니다. (이 글의 모든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고, 사진 역시 모두 KBS 역사스페셜의 캡쳐화면입니다.)


저분이 고영근 할아버지입니다. 저 때 사진이 71세때 사진이라고 하는군요. 

   명성황후 시해 !  
 

고영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난 을미사변, 경복궁 가장 북쪽 건청궁 안의 옥호루에서 한 나라의 왕비가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사무라이 "도 가츠아키"는


라고 기록을 남기는데요.
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한국의 외교정책과 일본과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지방을 획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분단국가로 요동지방의 중요성에 큰 의미를 두는 것에 어색해하지만, 고구려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요동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합니다. 정치, 경제, 외교, 정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일본이 아무리 승리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요동을 가져가는 것을 서구 열강들이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삼국간섭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입김으로 일본은 요동에서 한번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명성황후는


조선의 외교정책으로 "인아거일"을 채택합니다. 가끔, 명성황후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을 봐도, 확실히 그녀는 친러파라고 봐야겠습니다. 특히, 일본과 거리를 두고싶어하는 조선의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대항마는 러시아였으니까요.
문제는 많은 피를 흘려 얻은 요동을 러시아의 말 한마디에 도로 놓쳐버린것도 견디기 힘든 와중에 조선의 왕비가 일본보다 러시아를 가까이 하는 것을

 
조선 총독부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1895년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우범선 !  
 


당시 일본 공사관의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작전명 : 여우사냥) 결정하는데요. 을미사변 한달전쯤인 1895년 9월 5일에 최초 모의를 합니다.


이때 조선훈련원 대대장 우범선이 큰 역활을 담당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인들이 결정적으로 왕비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접 구술한 내용을 기초로 만들어진 "우범선최후사"라는 책을 보면



먼저 문밖에서 파수를 보다가 사건 직 후, 명성황후의 시신을 보고 왕비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역활을 맡았던 것입니다. 특히, 그가 인솔한 훈련원 병사들이 궁전 안에서 호응함으로서 쉽게 궁궐 수비대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 후 시신을 불태우라는 명령도 역시 우범선이 내린 명령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조국의 국모를 시해하는 사건에 깊이 관여해 있는데요. 시해 후 국내 여론이 안좋아지자 일본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예외적으로 그는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생활하고, 그 경제적 지원은 아들들에게 까지 이어집니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는데 그 아들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우장춘 박사입니다.

   고영근, 국모의 복수를 하다 !  
 

어머니를 잃은 아들, 태자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근은 일본으로 건너가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가 이룬 복수는 당시 직접 쓴 편지에도 남아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자수를 합니다.

 
일본의 신문들은 우범선을 "열사"

 
"강개의 지사"

라고  칭하며, 그의 죽음에 놀랐다고 하는데요. 그러면서 고영근의 우범선 살해사건을


비문명의 오욕이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복수극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살인사건으로 축소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시 러일전쟁 준비로 고종황제의 협조가 필요했던 일본에 고종은 고영근에 대한 판결에 선처를 요청합니다. 이에 일본은 고영근을 5년후 조선으로 석방시켜줍니다.

   고영근, 시대의 충신 !  
 

그 후, 고종이 의문사하게 되고, 다시 고영근에 의한 홍릉비석사건이 일어납니다.


사건의 발단은 고종황제 승하 후, 비문에 태황제라는 글자를 새길 수 없게 조치한 일본에 반발, 고영근이 인부를 동원해서 직접 비석을 세운 사건인데요.


그때 고영근의 나이가 71세였다고 합니다. 그는 고종 승하후 능참봉을 자원하여 묘소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원래 비석은 명성황후때 만들어져서


명성황후라는 딱 네 글자만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고종태황제홍릉이라는 글자와 명성황후 글자 사이에 태자를 넣고, 같이 안장되었다는 의미로 부좌를 추가하여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자 당시 조정에서는 스스로 비석을 없애버릴려고 했는데, 고영근의 반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당시 백성들은 이미 고영근이 다시 세운 비석에 와서 조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민심에 이상이 생길것을 우려하여 비석을 가리게 되고, 이 일은 일본 본토에 보고 되어 논의 되었다고 하는데요. 결국


어마어마한 동요가 발생할 것을 걱정하여 조선총독부는 능비를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후, 고영근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 잘 보이는 곳에 초갓집을 짓고 살다가 그 이듬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요.


비록, 여러 해석이 분분한 조선말기이고, 국가의 멸망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있지만, 저렇게 평생을 충성으로 일관한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대단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두산백과사전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고영근 (1853-1923)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민영 익(閔泳翊)의 시중꾼으로 궁중에 드나들다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눈에 들어 1891년 함 경도 매광감리(煤鑛監理), 189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98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되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하였다.
1898년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 국협회(皇國協會) 부회장을 지내다가 협회가 수구파 폭력단체가 됨을 깨닫고 탈퇴하여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가담하였다. 친러정부가 등장한 것에 울분한 시민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군중집회)를 개최한 가운데(1898. 11. 5), 고영근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만민공동회는 6일간 철야 시위를 하면서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을 성공시켰고, 이어서 독립협회 복설, 독립협회를 모략한 자 처벌, 헌 의 6조 실시 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황국협회가 투입한 보부 상의 공격으로 만민공동회가 괴멸 직전에 있었으나 보부상 집단을 역공하여 회복시켰고, 만민공동회 해산을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황국협회계 인물 8명 처벌, 보부상 혁파, 시민이 원하는 인재 등용이란는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정부가 임명한 중추원의관에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출신의 17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정부의 무력에 의해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만민공동회가 붕괴되자, 이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1899년 최정덕(崔廷德) 등과 함께 수구파 대신들을 암살할 계획을 짰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피신하였다.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 영효(朴泳孝), 윤 효정(尹孝定), 안경수 등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고영근은 윤효정을 통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전모를 전해듣게 되었다.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呉市]에 거주하고 있는 우 범선에게 접근하여 그의 신뢰를 얻은 다음, 1903년 11월 24일 종자(從子)인 노원명(盧遠明) 과 힘을 합하여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우범선(禹範善)을 죽였다. 이 일로 일본 재판 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선 정부의 교섭으로 1909년 국내로 송환되고 죄도 면하게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여 홍릉(洪陵)에 묻히자, 1921년 3월 능참봉(능을 지키는 하급 관리)이 되어 무덤을 지켰다. 홍릉 비문의 문구를 두고 조선총독부와 이견으로 능비가 세워지지 못하자 이를 자의적으로 건립하였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병사하여 홍릉 인근에 묻혔다.
- 자료참고 : 두산 백과사전 -


그나저나 이제 아침먹어야할 시간이네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핑구야 날자 2010.07.15 08:30 신고

    역사공부를 다시하게 되었네요,,, 몰랐던 내용도 많네요,, 반성하고 갑니다.

  2. BlogIcon 아이미슈 2010.07.15 11:52 신고

    그래요..이런 충신도 있었네요..실로 떠올리고 싶지않은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누가 어떤말을 해도 절대 일본를 좋아할수 없는 수많은 이유중에 아주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우장춘박사라면 그 씨없는 수박의...
    갑자기 수박은 그냥 씨있는걸 먹을 생각이 듭니다..흑

  3. BlogIcon 탐진강 2010.07.15 21:32 신고

    충신 고영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글이네요.

    • BlogIcon PinkWink 2010.07.16 03:46 신고

      만약 무협소설이 배경이었다면, 주군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호법의 역활이 꽤 어울리는 듯 보이죠...^^

  4. BlogIcon 모피우스 2010.07.18 05:26 신고

    고씨 가문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신줄 몰랐습니다... 사실 저.. 고씨거든요.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PinkWink 2010.07.18 05:38 신고

      앗.. 그러시군요^^.. 훌륭한 분들은 오래기억되어야하는데... 어린 학생들의 역사 지식이 너무 단편적인 사건위주로 가는것 같아 좀 쓸쓸할 때도 있습니다.^^

  5. BlogIcon 라라윈 2010.07.19 00:36 신고

    핑크윙크님 덕분에 몰랐던 우리나라 역사를 많이 배우고 있어요..
    로마의 이야기, 타국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는데,
    우리의 근현대사도 잼있어요~ +_+

    • BlogIcon PinkWink 2010.07.19 06:44 신고

      지나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특히.. 이번글은 아니지만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그걸 비록 인터넷뿐이지만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재미가 솔솔해요^^

  6. BlogIcon 클라리사 2010.07.19 17:28 신고

    호...같은 시대에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두 신하네요.
    근데 한쪽은 떵떵거리며 잘살고...한쪽은...역사에라도 잘 기록되길 ㅜㅜ

    일본 후쿠오카에 명성황후 시해에 쓰였던 칼이 보관된 신사가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한국관광객들은 그냥 관광지로 둘러보는 듯해서 분했던 생각이 납니다.

    우장춘 박사 ㅜ.ㅜ

  7. BlogIcon 촌스런블로그 2010.07.20 10:19 신고

    이런 우리의 역사와 충신에 대해 몰랐던 자신이 참 부끄럽습니다. 요즈음 국사과목을 선택으로 한다 없앤다 말들이 많은 데 정말 천박한 인식처럼 여겨집니다. 충신 고영근의 행적을 읽으면서 자랑스러우면서 우리의 과거 역사가 참 슬프지네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 BlogIcon PinkWink 2010.07.20 10:35 신고

      왜 우리는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국사의 필수여부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재미나게 가르치고 평가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암기 위주의 수업에서 탈피시키겠다는 논리이니 앞뒤가 바뀐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8. BlogIcon dowani 2010.08.02 10:50 신고

    벌써 17년전 김원우 장편소설 "우국의 바다"에서 고영근은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그 책을 이번에 다시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들어와좋은 자료 보고 갑니다..
    근데 kbs에서 역사스페셜로 다루었나 보군요,, 못 봐서 안타깝지만 이 자료를 보고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을듯 합니다..

  9. BlogIcon dowani 2010.08.02 11:49 신고

    고영근이란 이름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처음등장한다고 합니다.,..
    소설가 김원우씨도 매천야록을 통하여 처음 접하고 약10여년에 거쳐 원고를 탈고하였구요,,
    요즘 들어 회자되는 자객이란 표현은 조금 무식한 표현이 아닐런지요,
    고영근은 "우국지사" 였읍니다..

    • BlogIcon PinkWink 2010.08.02 12:50 신고

      음.. 자객이라고 표현한다구요?? 그건 좀 이상하네요...그러면 안될것 같은데 말이죠... 작가의 직업을 가지신 분들은 참으로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10년이나 준비를 하시다니...^^

  10. landashy 2010.08.30 21:15 신고

    아아.. 충신인 것은 정말로 맞습니다만, 문제는 그 충성을 받는 대상이 위대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저 '숲처럼 무성하던 민씨 족속'이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명성왕후가 외척세력을 통해서 나라를 거덜내었다는 역사적 진실이 떠오릅니다.
    충신이기는 쉽지만 양신이기는 어렵다는 정관정요가 생각나는 군요.
    훌륭한 신하를 찾기는 쉽지만, 훌륭한 왕을 찾아서 섬기기는 어렵군요..

    • BlogIcon PinkWink 2010.08.31 09:23 신고

      충신과 양신... 충분히 공감합니다. 단지 충성보다는... 결과적으로 올바른 길로 국가를 움직여줄 양신이 조선 후기엔 너무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결국 국가의 힘이 그 정도였던 걸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