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기원전 69년에 태어나 기원전 30년에 죽은 클레오파트라는 블레즈 파스칼의 그녀의 코가 조금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말로 보여지듯이 미모로 남성을 유혹하는 요녀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하여튼 그런 그녀는 독사를 풀어 스스로 독사에 물리는 방법으로 자살을 하게 되는데요.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 주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세 명의 남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를 통해 알아볼려고 합니다.
이집트의 정치적 환경...!
유명한, 서양의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대왕(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받은 알렉산드로스(영어: 알렉산더)에 의해 이집트가 정복당합니다. 이 때, 이집트는 신의 아들이 다스린다는 개념으로 왕이 군림하고 있었는데요, 그리스 문화권인 마케도니아 왕가의 왕자에게 정복당하게 되자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무너질 위험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이집트 아몬 신전의 신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거 신에게서 계시가 내려왔는데 당신은 신의 아들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의 특수한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을 가뿐히 신의아들이라고 인정해버리는데요.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직후인 기원전 323년에 그의 계승자이자 휘하 장군들중 한명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그리스계 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게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입니다. 이 왕조는 기원전 305년부터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죽는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하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12세가 내분으로 인해 쫓겨나 로마에 도움을 청합니다. 이때 그를 '로마인의 친구'라며 도와준 사람이 폼페이우스입니다. 물론 당시 집정관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로도 역시 도와주지요. 그런데 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내전에 들어가고 밀려난 폼페이우스가 예전에 도와준 이집트로 들어갈때 이집트의 당시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그 신하들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그 목을 카이사르에게 보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비록 내전에서의 상대편이었지만, 로마인, 그것도 전직 집정관을 암수를 사용해서 살해한 행동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갑니다.
당시 이집트의 지배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을 때 유언으로 두가지를 남깁니다. 맏공주(클레오파트라)와 맏아들(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공동으로 통치할것과 이집트 왕가는 앞으로도 계속 '로마의 친구'로 남을 것이지요. 위의 상황으로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도착할 당시 이 선왕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그 측근이 클레오파트라를 몰아내고 도망자신세로 만들어 버렸거든요.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승리자로서 이집트에 들어온 카이사르에게 도망자 신세인 클레오파트라의 선물이 도착하는데요. 그 선물은 긴 깔개로 포장되어있었는데 그걸 풀자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눈부신 나신의 클레오파트라 본인이었다고 하지요. 이 때 카이사르는 이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라당 반해서 그녀를 왕으로 복귀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52세의 카이사르와 21세의 클레오파트라가 처음만난 사건이 이렇지요.^^. 그러면 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복귀를 허락했을까요. 이게 과연 클레오파트라의 매력때문이었을까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왕위복귀를 도와준것은 폼페이우스입니다. 이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왕가의 은인이 된것입니다. 비록 내전에서 서로 칼을 대고 있던 관계이긴 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모두 현실적인 로마인들로서 대화조차 안하는 관계는 아니였습니다. 또 공과 사의 구분이 다른 민족에 비해 확실했던 로마인들은 내전의 적이라 해도 공인으로서의 신분또한 보장해줄때가 많았습니다. 몇몇 다른 예도 있지만, 대체로 로마인들은 패장이라도 벌하지 않았고, 반란의 주모자라 하더라도 가족까지 처벌하지 않았으며, 무작정 지배적으로 주변국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로마민족이 볼때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단독 통치는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선왕의 유언이 남동생과의 공동통치였으니까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러나, 카이사르의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그 측근들이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일으키고 뭐 알다시피 또 카이사르는 승리자가 되지요. 이 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단독 통치가 시작됩니다. 기나긴 내전이 끝날 무렵에 만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나일강의 수원 탐사한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를 들어서 사실상 휴가를 보냅니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아이의 이름을 카이사리온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정확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모양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카이사르는 당시 단지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때문에 그녀를 단독 왕위에 앉혀준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본인이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하더라도 또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알려진 대로 카이사르는 여자를 유혹하는데에는 카사노바 못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렇게 믿도록 놔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로마인 이야기를 지은 시오노 나나미씨의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을 나누어보면 여자의 자질도 알게 된다. 카이사르는 명석한 두놔와 강한 의지를 가진 클레오파트라가 공동 통치자의 한 사람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소년 왕이 측근들의 영향을 받기 쉬운 나약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 뒤에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요컨대 애인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다 해도, 카이사르 한테는 클레오파트라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해줄 이유가 많았다. 국제 정치는 연애가 개입하여 좌우할 수 잇을 만큼 허술하지 않다. 또한 카이사르는 원래 여자와 사랑은 할만정 여자한테 깊이 빠지지는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그것을 자신의 매력 덕택으로 믿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라면 여자가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에야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게 아닐까. 그때 그녀가 느낀 굴욕감이 그 후 그녀의 반생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이 바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였을 겁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사르의 오른팔로서 전쟁에서의 무훈도 상당하며 오랫동안 카이사르의 인정을 받았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18세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옥타비아누스가 적혀있었을때 분명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떤한 내용도 없다는 것에 클레오파트라도 또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구요. 이 둘이 가까워지는 것은 뭐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내전에 들어갔을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합니다. 아니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결혼까지 합니다. 일류 정치가이자 승부사이며, 로마역사상 유일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받는 카이사르한테는 그저 애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클레오파트라도 안토니우스에게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왜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지만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영향을 받는 안토니우스는 너무 많은 실책을 범합니다. 일단 로마라는 국가의 공인으로서 로마의 시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외국인 이집트 여왕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사용해버립니다.
하여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이 주변 오리엔트국가들을 자극해 버립니다. 또 안토니우스를 향한 본국 로마시민들의 감정을 돌려버리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장군이 마녀같은 외국인 여왕의 꼬임에 넘어가 우리의 군대(내 아버지, 형제가 참여하고 있는)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꽤 문란한듯 인식되어있지만, 사실 실제로 자기의 남자로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은 이 안토니우스 한사람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 목매는 타입으로 보이는 이 안토니우스는 그러나 너무 무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카이사르와 함께했던 그 용맹함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건지...
역시 이미 알려진 사실대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은 옥타비아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은 물러날테니 아들 카이사리온의 제위계승을 승인해달라는 협상을 시작합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80세가까이 살면서 로마제국의 초대황제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이 냉정함과 인내심, 그리고 균형감각을 이미 어릴때부터 카이사르에게 인정받았던 모양입니다. 후일에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보다는 원로원이 바친 존귀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져 있지요. 이 옥타비아누스도 역시 승리자로서 이집트에 들어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따위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하긴 당시 정력결혼이 흔했고 그래서 이혼이 별다른 흠이 되지 않았던 시대인 로마시대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리비아라는 검소하고 소박한 여성과 죽을때까지 이혼하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성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안토니우스의 무덤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클레오파트라를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감금상태인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으로 외출할 수 있었던 곳은 안토니우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을 하게 되는데요. 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끝납니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관계가 그리 깊지 않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에서 중립의 위치만 지켰더라도 아마 그와 같은 결과는 나오질 않았을 겁니다만...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왕가의 사람들중 딱 한명을 처형합니다. 바로 카이사리온이지요. 자신의 주적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살려뒀는데 카이사리온만 죽였습니다. 후계자는 한사람이면 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다시 시오노 나나미씨의 글을 인용합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제는 카이사르의 참뜻을 이해했을까. 카이사리온을 친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 그 아들을 위해서나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도 좋다고 판단한 카이사르의 진정한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카이사리온을 친아들로 인지하기는커녕 유언장에서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은 것이 사실은 카이사르의 깊은 뜻이었다는 것을 이해했을까.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 가운데 옥타비아누스가 죽인 것은 카이사리온뿐이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셋 다 살아남았다. 카이사르의 아들, 즉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클레오파트라가 죽기 직전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남기는데 그 중 한 내용이 안토니우스의 무덤에 같이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원은 옥타비아누스도 들어주는데요. 클레오파트라의 자실의 원인은 옥타비아누스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일차원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솔직히 말하면 안토니우스가 절반 이상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사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깊은 후계분쟁이 일어낫을때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적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내전이 끝나고 카이사르와는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사람을 숙청했지만, 반대파 모두를 숙청한 것도 아닙니다. 안토니우스의 아들들도 살려뒀으니까요. 심지어 오른팔처럼 중용한 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토니우스가 좀더 현실감있는 결단을 잘 내리는 사람이었다면 클레오파트라도 불행한 결말을 맺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가 좀더 로마인으로서 로마인답게 행동하며 그녀를 애인의 위치에 놔두었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는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정략결혼이 일상이었던 로마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자체가 흠이 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사랑을 어떻게 이성으로 누르냐고 이야기하면 뭐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하여간 뭐 쓸데없는 이야기를 그냥 주절 거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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